2011년 9월 5일 월요일

크레이지 배가본드 (천상병)

1
오늘의 바람은 가고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잘 가거라
오늘은 너무 시시하다.

뒷시궁창 쥐새끼 소리같이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2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담배를 빤다.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물을 마신다.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우물가, 콩초 토막...

광화문 근처의 행복 (천상병)

광화문에.
옛 이승만 독재와
과감하게 투쟁했던 신문사
그 신문사의 논설위원인
소설가 오상원은 나의 다정한 친구.

어쩌다 만나고픈 생각에
전화 걸면
기어코 나의 단골인
'아리랑' 다방에 찾아온 그.
모월 모일, 또 그랬더니
와서는 내 찻값을 내고
그리고 천 원짜리 두개를 주는데---
나는 그 때

"오늘만은 나도 이렇게 있다"고
포켓에서 이천원을 끄집어 내어
명백히 보였는데도,
"귀찮아! 귀찮아!" 하면서
자기 단골 맥주집으로의 길을 가던 사나이!
그 단골집은
얼마 안 떨어진 곳인데
자유당 때 휴간 당하기도 했던
신문사의 부장 지낸 양반이
경영하는 집으로
셋이서
그리고 내 마누라까지 참석케 해서
자유와 행복의 봄을---
꽃동산을---
이룬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저와 같은 버러지에게
어찌 그런 시간이 있게 했습니까?

편지 (천상병)

점심을 얻어 먹고 배부른 나는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2011년 9월 1일 목요일

푸른 것만이 아니다 (천상병)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있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듯이 안 보일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삼월 사월 그리고 오월의 신록
어디서 와서 달을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던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있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행복 (천상병)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백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