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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0일 일요일

기쁨 (천상병)

친구가 멀리서 와,
재미있는 이야길 하면,
나는 낄낄 웃어 제낀다.

그때 나는 기쁜 것이다.
기쁨이란 뭐냐? 라고요?
허나 난 웃을 뿐.

기쁨이 크면 웃을 따름,
꼬치꼬치 케묻지 말아라.
그저 웃음으로 마음이 찬다.

아주 좋은 일이 있을 때,
생색이 나고 활기가 나고
하늘마저 다정한 누님과 같다.

그 날은 (천상병)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 날은...

이젠 몇 년이었던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 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구름 (천상병)

저건 하늘의 빈털털이 꽃
뭇 사람의 눈길 이끌고
세월처럼 유유하다.

갈데만 가는 영원한 나그네
이 나그네는 바람 함께
정처없이 목적없이 천천히

보면 볼수록 허허한 모습
통들어 무게 없어 보이니
흰색 빛깔로 상공 수 놓네

2011년 9월 5일 월요일

광화문 근처의 행복 (천상병)

광화문에.
옛 이승만 독재와
과감하게 투쟁했던 신문사
그 신문사의 논설위원인
소설가 오상원은 나의 다정한 친구.

어쩌다 만나고픈 생각에
전화 걸면
기어코 나의 단골인
'아리랑' 다방에 찾아온 그.
모월 모일, 또 그랬더니
와서는 내 찻값을 내고
그리고 천 원짜리 두개를 주는데---
나는 그 때

"오늘만은 나도 이렇게 있다"고
포켓에서 이천원을 끄집어 내어
명백히 보였는데도,
"귀찮아! 귀찮아!" 하면서
자기 단골 맥주집으로의 길을 가던 사나이!
그 단골집은
얼마 안 떨어진 곳인데
자유당 때 휴간 당하기도 했던
신문사의 부장 지낸 양반이
경영하는 집으로
셋이서
그리고 내 마누라까지 참석케 해서
자유와 행복의 봄을---
꽃동산을---
이룬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저와 같은 버러지에게
어찌 그런 시간이 있게 했습니까?

편지 (천상병)

점심을 얻어 먹고 배부른 나는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2011년 9월 1일 목요일

푸른 것만이 아니다 (천상병)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있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듯이 안 보일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삼월 사월 그리고 오월의 신록
어디서 와서 달을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던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있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행복 (천상병)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백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날개 (천상병)

날개를 가지고 싶다.
어디론지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싶다.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날개를 안 다셨는지 모르겠다.
내같이 가난한 놈은
여행이라고는 신혼여행 뿐인데
나는 어디로든지 가고 싶다.
날개가 있으면 소원 성취다.
하나님이여
날개를 주소서 주소서...

나의 가난은 (천상병)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렵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폋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숡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

2011년 8월 25일 목요일

새 세 마리 (천상병)

나는 새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텔레비 옆에 있는 세 마리 새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짜 새가  아니라
모조품이기 떄문이다.

한 마리는 은행에서 만든 저금통 위에 서 있는 까치고
두 마리는 기러기 모양인데
경주에서 아내가 사 가지고 왔다.
그래서 세 마리인데
나는 매일같이 이들과 산다.

나는 새를 매우 즐긴다.
평화롭고 태평이고 자유롭고
하늘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진짜 새처럼 애지중지 한다.

아가야 (천상병)

해뜨기 전 새벽 중간쯤 희부연 어스름을 타고 낙심을 이리저리 깨물며
사직공원길을 간다. 행도 드문 이 거리
어느 집 문밖에서 서너 살 됨직한 잠옷 바람의 앳된 계집애가 울고 있다.
지겹도록 슬피 운다.
지겹도록 슬피 운다.
웬일일까?
개와 큰집 대문 밖에서 유리 같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이 애기는 왜 울고 있을까?
오줌이나 싼 그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자주 뒤 돌아보면서
나는 무심할 수가 없었다.
아가야 왜 우니?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무슨 슬픔 당했다고
괴로움이 얼마나 아픈가를 깨쳤다고 우니?
이 새벽 정처없는 산길로 헤매어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아가야, 너에게는 그 문을 곧 열어줄 엄마 손이 있겠지.
이 아저씨에게는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울지 마!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주일 2 (천상병)

1.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골목에서 거리로.
옆길에서 큰길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과 건물이 있습니다.
상관않고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느냐구요?
숲으로, 바다로.
별을 향하여
그는 쉬지 않고 걷고 있습니다.

2. 낮에는 찻집, 술집으로
밤에는 여인숙,
나의 길은 언제난 꼭 같았는데...

그러나 오늘은 딴 길로 간다.

유리병 (천상병)

창은 다 유리로 되지만
내 창에서는
나무의 푸른 잎이다.

생기 활발한 나무잎
하늘을 배경으로
무심하게도 무성하게 자랐다.

때로는 새도 날으고
구름이 가고
햇빛 비치는 이 유리창이여-

나무 (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 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